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3 대전 엑스포 (문단 편집) == 유치 과정 ==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노태우 정부]]는 바로 그해 말 새로운 업적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박람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개발도상국]]이 대규모 박람회 개최를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는 [[테크트리]]를 타기로 한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1964년 [[1964 도쿄 올림픽|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후 1970년 [[1970 오사카 엑스포|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벤치마킹한 것. 중국도 한국의 사례를 다시 벤치마킹해서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10 상하이 엑스포]]로 비슷한 테크를 탔다. 그래서 정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무역산업박람회'를 1991년 개최하려고 하지만, 유례 없는 대규모 행사를 위한 예산 배정에 대해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결국 개최를 반대하던 측에서 내놓은 조건이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으라는 것. 당연히, '''"공인을 받을 리가 없지"'''라는 생각에 그러한 조건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개최 연도가 2년 뒤인 1993년으로 늦추어졌다. 문제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는 엑스포 개최와 관련하여 1999년까지 엑스포 개최를 공인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해놓은 상태였다. 즉, 각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그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회원국들을 압박[* 엑스포에 참가하는 각국은 자신들의 전시관을 자신들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한국이 참가한다면 한국관은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짓는다. 모든 경기장을 개최국의 예산으로 건설하는 올림픽 등과는 다르다.]하는 한편으로 행사의 부실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직위원회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가 저예산의 신개념 엑스포[* 1988년 개정 규약에 규정되고, 1996년부터 시행된 [[엑스포|인정박람회]]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다.]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즉, 앞으로 시행될 저예산 엑스포인 인정박람회의 원형으로서 대전 엑스포를 어필한 것이다. 물론, [[모라토리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히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렵던 [[미국]][*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의 대전 엑스포 참가 예산을 배정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세계박람회기구에서도 탈퇴했다.]이 대표적인 국가였으며, 그러한 점을 각국 대표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다녔다. [[오명(정치인)|오명]]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전에 유럽에서 열린 몇 번의 엑스포들에서 미국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은 엑스포를 '''"미국을 알아주지 않는 행사"'''라고 바라봤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1993년 2월에야 대전엑스포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단기간에 쓸 만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당시 SBS 8 뉴스 보도를 보면 왜 저런 단신 같은 뉴스가 헤드라인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 반면, 당시 한국으로부터 금전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던 [[소련]]은 한국의 엑스포 개최를 반대하는 [[쿠바]] 대표를 조용히 구석으로 데려가 찬성하기 싫으면 기권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기권한 국가를 빼고는 모두 찬성하여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는 데에 성공했다. 당초 개최 장소로는 [[안산시]]가 유력했으나, 지방 균형 발전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왕이면 전국에서 1시간 내[* 말은 1시간 내인데 도서 지방을 제외해도 경기 김포, 강원 속초, 전남 해남, 부산에서는 2020년대에도 1시간 내 도달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고속도로/대한민국|고속도로]]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시간이다.]에 당도할 수 있는 곳에서 박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 그리고 마침 ''''대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한 공군 기지의 활주로가 있으니 그 활주로에 천막을 치고 전시회를 열면 예산이 절약될 것''' 이라는 생각으로 대전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활주로에 천막치고 박람회를 개최하지는 않았다. 덧붙여 그 공군 기지는 지금 대전의 중심인 [[둔산신도시]] 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엑스포 개최 기간에는 한참 공사 중이었다. 참고로 그곳에 있었던 공군 기지는 다름 아닌 [[공군교육사령부]]로 1988년에 경남 진주로 이전. 저예산 신개념 엑스포의 원형이 될 것을 천명하여 국제박람회기구를 설득했지만, 결국 종합 엑스포의 규모를 가진 전문 박람회[* 일정 주제에 한정되는 전문 엑스포가 종합 엑스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는 5년 주기의 World Expo와 그 사이의 International Expo로 나뉘어진다.]가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인정박람회의 최대 전시 규모인 25만 ㎡의 두 배이자 여수 엑스포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 ㎡의 전시 공간 규모로 완성된 것이다. 대전 엑스포가 인정박람회가 된 것은 소규모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해서라기보다는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속아서(?) 한국 유치를 지지해준 인사들은 건설 현장을 방문해서는 전시관의 반은 걷어버려야 한다거나 하면서 분노했다는 듯. 대전엑스포 행사장 중에서 한빛탑이 있는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측에는 한국의 기업들 전시관이 들어서 있고 우측에는 각 나라별 소형 전시관들이 몰려 있는 건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전시 부문을 빼면 딱 인정박람회 규모에 맞추긴 했다. [[북한]]은 결국 불참했는데 이는 엑스포 개최 1년 전 제기된 미국의 북한의 핵 개발 문제 제기, 1993년 [[팀 스피릿]] 한미합동훈련 재개 및 북한의 [[NPT]] 탈퇴로 인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 크게 한몫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